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만(李東萬)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6501735
  • 전몰일자 : 19510527

공훈사항

이동만 이등상사는 1928년 11월 27일에 전라남도 고흥군 동인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5월 1일, 경기도 부평의 육군병기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강원도 춘천의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연대는 본부를 춘천에 두었고, 그는 연대본부에서 병참업무를 담당했다.
이동만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주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장병들은 소양강이라는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적의 진출을 3일간이나 지연시켰다. 이후 제6사단은 중동부 전선에서 지연전과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격퇴하고, 9월 16일부터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10월 26일에는 선두부대가 초산을 점령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이때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당하여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감행해야 했다. 사단 장병들은 12월 13일에는 38도선 상의 전곡-백의리를 잇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차후 예상되는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맞아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아침 8시까지 버티었으나, 이후 측후방이 차단당하여 포위될 위협을 느껴 진지에서 철수하여 의정부를 거쳐 서울 창동으로 이동했다. 이후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2월 11일에 홍천-횡성 방면에 집중한 중공군 2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제6사단은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4월 6일에 화악산을 좌우로 연하는 캔자스선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부대정비를 한 후 사단은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4월 20일에 공격을 재개하여 사창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큰 피해를 받았고, 가평 부근으로 철수했다가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이동했다.
중공군은 5월 16일에 5월 공세를 실시하자, 제6사단은 전초진지에 배치된 제2연대가 전면방어로 사수하고, 이동만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제19연대와 함께 5월 20일에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 장병들은 5월 24일부터 용문산에서 출발하여 계관산-북배산을 점령하였으며, 5월 27일에는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중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만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44-ㅂ-0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