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득(이동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701883
  • 전몰일자 : 19500928

공훈사항

이동득 일병은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혼란하던 1948년 7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동득 일병은 문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의 문산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방어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이 7월 4일 새벽 공격을 개시, 금곡리 부근으로 밀어붙이고 풍덕천-수원 도로를 따라 남진하자 일제사격으로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방어선이 돌파되고 결국 7월 4일 평택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7월 8일 음성을 중심으로 외곽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의 행군대열의 절반이 방어 정면으로 들어섰을 때 105mm 곡사포의 지원사격하에 각종 화기를 일제히 집중함으로써 적의 남진을 분산시켰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연전연패가 계속되자 9일 다시 무극리-음성, 신양리-음성 양측방 도로 접근로와 중앙 산간 접근로의 3개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새벽 무렵 북한군은 음성에 포격을 집중하면서 2개 연대병력을 각각 8대의 장갑차의 지원하에 연대 정면으로 공격하였으나 이 일병과 연대병력의 집중적인 저지사격과 역습에 의해 다시 저지되었다.
이동득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8월 초부터 고령에서 함창에 이르는 낙동강 전선에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큰 수훈을 세웠다.
가산(902m)은 대구 북쪽 16km에 위치한 중요한 감제고지로서 다부동-대구 간 도로와 대구까지도 감제하여 전술적으로 중요하였으므로 쌍방은 가산을 탈환하고자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9월 25일부터 38선 진격전을 위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과 맞서 싸웠던 이동득 일병은 1950년 9월 28일 평택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7판-1면-49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0-ㅁ-06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