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극(李東極)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98782
  • 전몰일자 : 19511002

공훈사항

이동극 일병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이 38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3월 17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19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극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4월 하순, 제6사단은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했으나, 이곳에서 중공군의 강한 저항을 받고 방어로 전환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사창리 일대에서 큰 피해를 받고 가평을 거쳐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5월 16일 시작된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전초진지에서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동극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는 5월 20일에 제7연대와 함께 용문산 주방어진지에 바로 반격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황급히 물러가고, 연대는 춘천 서북 방향으로 공격하여 계관산-북배산을 점령한 뒤, 5월 26일에 지암리(춘천 남서쪽 위치)를 미 제7사단 장병들과 함께 점령했다. 한편 사단 주력은 춘천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5월 28일 화천저수지 이남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6월 5일부터 철의 삼각지대를 포함하는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했다. 이동극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는 사단의 조공으로서 백암산에서 화천으로 뻗어 내린 643고지-887고지-992고지-취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10일에 취봉을 확보하고,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연하는 선을 점령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장병들은 방어진지에서 진지보강과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이 시기에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심혈을 기울이자, 유엔군사령관은 공산군의 공격 능력을 분쇄하여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공세행동을 하도록 각 부대에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에서는 제2연대가 9월 21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819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이동극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가 9월 24일에 공격 임무를 제2연대로부터 인수하여 9월 28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819고지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중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2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극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2167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11묘역-3판-74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ㅇ-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