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규(이동규)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11726
  • 전몰일자 : 19520317

공훈사항

이동규 이등중사는 1923년 2월 25일 경상남도 부산시 명륜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엉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16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동규 이등중사는 38선 진격전에 투입되어 10월 9일 연대병력과 함께 38도선을 돌파하였다. 이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조국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연대가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였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어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중공군은 또 한 차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1951년 4월 22일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고 이동규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파평산에서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지연시켰다. 그와 연대 장병들의 투철한 전투의지에 따라 중공군은 서울점령을 포기하고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하였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이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지만 서부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이등중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소규모 탐색전을 계속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2년 1월 3일 두매리고지 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122고지와 148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지를 탈환한 후 곧 이은 중공군의 역습을 받아 다시 빼앗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연대는 2월에 접어든 뒤에도 여전히 대규모 공격작전을 보류했으며 정찰과 기습을 통해 북한군과 계속 접촉을 유지하고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다만 아군의 경계선 및 주저항선의 요부에서 소규모 공방이 계속되었다. 이후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부대는 방어진지 보강과 작전지역에 대한 수색 정찰 활동에 집중했다.
이동규 이등중사가 소속된 소대는 3월 17일에 방어진지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고 격멸했다.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투 중에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규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7면-354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1-ㅎ-0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