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동걸(이동걸)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6346
  • 전몰일자 : 19510626

공훈사항

이동걸 중위는 1922년 2월 22일 서울시 서대문구 충무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중위는 사병으로 복무하다 장교를 지망했고, 1950년 11월 15일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여 제7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밀려 청천강 일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7사단은 11월 14일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사단은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중순경 38도선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은 제3차 공세 때 사단은 영월 북서방으로 후퇴했고, 이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침투부대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는 1951년 2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영월을 지켜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때 사단은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고, 리퍼작전(3. 7.~3. 31.) 때는 평창군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사단은 4월 중순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 소양강 변의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정자리 일대에 배치된 사단은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사단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해서 이곳에서 적의 돌파를 더는 허용하지 않고 진지를 지켜냈다.
북한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757고지, 917고지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일련의 전투에서 이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적진에 투입되어 적정을 살피다가 6월 26일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동걸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93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ㅍ-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