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희(李道熙)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K1135291
  • 전몰일자 : 19521012

공훈사항

이도희 하사는 1928년 11월 1일 경상북도 영천군 고경면에서 출생하였다. 이 하사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이 하사는 1950년 9월 20일에 입대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으로 전입되었다가 육군의 부대조정에 의거해 제9사단 제29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입대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는 전황 속에서 제9사단은 10월 25일에 서울에서 제28·제29·제3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창설되었다.
12월 19일부로 제9사단은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그 후 38도선 상의 강원 인제군 원대리-현리-서림을 잇는 선을 방어하였다. 이어서 12월 31일에 시작된 중공군 제3차 공세 당시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었다. 사단은 원대리-서림을 잇는 방어진지에서 북한군 제10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유엔군과 북한군은 1951년 11월 27일 현 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큰 전투 없이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와 전투정찰 위주의 탐색전이 1952년 전반기까지 지속되었다. 사단의 좌전방에 배치된 연대는 1952년 4월 19일에 사단 정면에 위치하여 아군의 관측과 기동에 제한을 주던 300고지를 기습했다. 또한 적의 방어시설을 파괴하고 적병 일부를 사살 후 철수했다.
제9사단은 1952년 6월 21일에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제112사단과 12차례의 백병전이 거듭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제9사단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철의 삼각지 서남부에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 하사는 11차 공방전에서 소대원을 이끌고 끝까지 진지를 지켜내다 적탄에 맞아 1952년 10월 12일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희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9-ㅈ-04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