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훈(李度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5102572
  • 전몰일자 : 19510516

공훈사항

이도훈 일등중사는 1931년 8월 1일 경기도 장단군 장단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고자 1949년 7월 13일 제7사단 제19연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 제7사단 제5연대로 전속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5연대는 의정부, 창동, 말죽거리, 과천, 안양 일대 전투에 투입되어 격전을 치르고, 문의-보은-청주로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펼쳤다. 연대는 7월 25일 해체되었으나, 8월 20일 민부대에서 제5연대로 개편되었고 제3·8연대와 함께 제7사단 예하부대로 재창설되었다. 연대는 군위,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고, 영천을 탈환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연대는 평강-곡산-평양 북방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로 진격했다. 연대는 11월 초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단과 혈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다.
연대는 묘향산 전방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11월 27일 철수를 개시하여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의 38도선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951년 2월의 중공군 제4차 공세 때 연대는 중동부 축선의 하진부리-평창-영월 선을 오르내리며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과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는 평창과 인제 일대에서 공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4월 22일 중공군은 제5차 공세(4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5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되어 북한군 제6사단과 격전을 벌였지만, 전투력의 열세로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소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 변의 부평리, 구만리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일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끝까지 진지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우다 5월 16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훈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8면-05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ㅈ-05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