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재(李道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20723
  • 전몰일자 : 19500821

공훈사항

이도재 일병은 경상북도 달성군 고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3월 초순,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부로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고, 사단 예비로서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에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했을 때, 제19연대 제3대대는 차량으로 저녁 8시에 춘천역에 도착했고, 본대는 원주에서 기차로 춘천역에 6월 26일 새벽 5시에 도착했다. 연대는 도착과 동시에 제7연대를 증원하여 춘천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고, 6월 27일에는 홍천 방면의 제2연대를 증원하여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에 홍천에서 원주로 철수했다.
이도재 일병이 소속된 제19연대는 7월 1일 야간에 이천지역으로 긴급히 투입되어 이 방면으로 진출하던 북한군을 차단시킨 후 7월 4일에 안성을 거쳐 진천으로 철수하였고, 7월 9일에 수안보로 이동했다. 이후 7월 12일 문경-점촌-함창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하다가 상급부대 명령에 의거 8월 1일 새벽에 낙동강을 건너 용기동으로 이동하여 8월 3일에 양곡동 일대의 능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19연대는 8월 6일에 방어 중인 용기동~양곡동간 능선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은 전투력의 열세로 진지에서 후퇴하여 선돌주막 남쪽의 236고지를 새로운 방어진지로 점령했다. 연대는 8월 8일 오전 11시경에 북한군이 선돌주막 부근까지 진출하자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한 후 철수하여 조동과 외곡동 일대를 점령했다.
이도재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8월 13일에 군위, 의흥을 경유해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해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북한군 제1사단은 전차를 지원받아 격렬하게 공격을 시작했고, 아군은 강력히 방어하여 격퇴했다. 또한 북한군은 8월 18일 새벽에 여명공격을 했고, 아군은 전투력 열세로 국통산과 324고지, 169고지 일대로 철수하였고, 이곳에서 강력히 저항하여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제19연대는 치열한 전투로 피해가 증가하자, 8월 21일 야간에 민 부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기로 했다. 이때 북한군이 아군의 방어진지 교대 징후를 포착하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7판-6면-03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9-ㅌ-05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