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식(이도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85239
  • 전몰일자 : 19510302

공훈사항

이도식 일병은 함경남도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쌍방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인 1951년 1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도식 일병이 전선에 배치될 당시 수도사단은 태백산맥 동쪽의 동해안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비교적 접적이 경미하여 38도선 북쪽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아군의 전반적인 전선 조정에 따라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여 부대정비에 주력하며 차후 공격에 대비하여 전후방지역에 대한 대대 규모의 위력수색작전으로 접적을 유지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사단이 주문진 부근에서 신방어선으로 철수하는 틈을 이용하여 북한군 제69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약 6,000명이 강릉 부근까지 남하하여 강릉-구산리 선에서 방어와 유격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도식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적에게 재편성과 재보급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할 목적으로 2월 2일 강릉과 구산리-대관령을 확보한 다음 경강국도 북방의 황병산-운계봉선까지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4~7일 사단은 강릉 동남쪽 7㎞전방까지 진출한 후 북한군의 측방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이도식 일병과 사단 일부 병력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소탕하고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으로 양호한 항구와 비행장이 있는 강릉은 물론 경강국도상의 요지인 대관령, 횡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어서 2월 25일부터 속사리 일대로 공격해 들어갔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저지되자, 항공지원을 요청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일병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도식 일병은 1951년 3월 2일 속사리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39면-2165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ㄴ-04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