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삼(李道三)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904287
  • 전몰일자 : 19510929

공훈사항

이도삼 하사는 1933년 7월 14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지키고자 1950년 8월 하순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천 전투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연대는 경주 무릉산 전투에서 격전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내고 반격의 발판을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사단은 9월 22일부터 추격작전을 전개했고, 연대는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하여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연대는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에서 3일부터 7일까지 중공군 제1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했다. 연대는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고, 이후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38도선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에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영월-평창-하진부리 축선에서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였고, 3월 12일 평창군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4월 초 유엔군의 공세작전 때 연대는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 5월 공세 때는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5월 말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연대는 유엔군 전체 방어선 가운데 남으로 만곡부를 이루고 있는 양구 일대의 전선을 밀어 올리기 위해 8월 9일 백석산 남쪽의 917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적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9월 2일 목표를 확보했다. 이어 연대는 9월 15일 883고지-892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치열한 교전을 거듭한 끝에 9월 18일 마침내 883고지를 확보하고 적의 역습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9월 29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삼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유해(52묘역-1판-273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3-ㅇ-06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