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봉(李禱鳳)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44879
  • 전몰일자 : 19510321

공훈사항

이도봉 일병은 경상남동 울산광역시 강동에서 1922년 9월 26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12월경 입대 후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8사단 제10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전입한 후 제8사단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북한군과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직면했다. 제8사단은 적의 주 접근로에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제8사단 장병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좌·우측 전선이 돌파되었기에 제 8사단은 강원도 홍천군 방면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였다.
제10연대는 1951년 1월 25일 유엔군과 함께 중공군의 공세에 일제히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1951년 2월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연대는 많은 병력을 손실하고 이후 부대 재편과 강원도 횡성군에 주저항선을 설치하여 적의 공세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철저히 구축했으며, 더불어 적의 주 접근로에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후 육군본부 직할대가 되어 후방경계임무에 투입되었다.
이후 제10연대를 비롯하여 소속 연대들은 1951년 2월 4일부터 집결과 함께 진격을 개시했다. 아군과 적군은 고지 선점을 위한 수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중공군의 유인책이었으며, 1951년 2월 11일부터 중공군 제4차 공세가 전개되었다.
중공군은 제8사단을 비롯한 연대들에 소수 병력으로만 저항하다가 1951년 2월 12일 자정을 기점으로 대병력을 투입하여 아군 전선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8사단을 포함하여 모든 연대는 중공군에 의해 고립된 채 후방이 포위되었다. 제8사단은 포병 1개 대대와 전차 5대로서 포위를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소부대로 분산되며 철수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제4차 공세로 제8사단은 장교 약 300여 명과 사병 약 7,000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되었으며, 남은 인원은 3,00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8사단은 1951년 3월 대구로 이동하여 전력을 재정비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이 일병은 부안군에서 토벌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적탄에 맞아 1951년 3월 21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봉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1-ㄲ-09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