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도림(이도림)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20245
  • 전몰일자 : 19521017

공훈사항

이도림 중위는 출생일자와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중위는 1947년 1월 17일에 임관 후 제7사단 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1950년 7월 5일에 제7사단이 해체됨에 따라 제1연대는 수도사단에 편입되었고, 동년 10월 25일에 제9사단이 창설될 때 제9사단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제1연대 소속이었던 이 중위는 전후 행정처리 과정에서 소속이 제9사단으로 정리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과 그 북방의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 일대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9사단은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철원 서북방의 요충지인 395고지(백마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6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유엔군과 북한군은 1951년 11월 27일에 현 전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큰 전투 없이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와 전투정찰 위주의 탐색전이 1952년 전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제9사단은 1952년 6월 21일에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사단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위와 중대 장병들은 9월 19일 수색정찰 작전 중에 적 2개 소대와 직면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적 3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사단은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제112사단과 12차례의 백병전이 거듭되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제9사단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철의 삼각지 서남부에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 중위는 12차 공방전에서 끝까지 진지를 지켜내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1952년 10월 17일에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도림 중위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1-ㅁ-039)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