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주(李德柱)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713

공훈사항

이덕주 경사는 1927년 5월 6일 전북 진안군 상전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장수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장수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장수경찰은 지역 내 주요 시설 경비와 장수-진안, 장수-무주, 장수-함양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오열 색출 임무수행을 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진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자 군경부대는 마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에 대비하기 위해 경남·전남·전북의 경찰병력 4,000명으로 전투편성을 한 다음,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면에 두고 미 제25사단, 한국 해병대와 합동으로 적과 대치했다.
8월 하순이 되자 경찰부대는 적의 최종공세에 대비하여 진동리지구에 경남경찰, 전남경찰을 배치하고, 함안지구에는 전북경찰을 배치하여 미 제25사단의 방어진을 보강했다. 또한 의령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 제7사단에 대비하여 전북경찰 1개 대대를 함안군 법수면에 배치하고, 미산령과 전투산에는 전북경찰독립대대와 전남경찰 2개 중대를 배치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자 각 도(道) 경찰국은 관할지역 경찰관서를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10월 초 장수경찰서를 수복한 장수경찰은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며 잔적소탕을 전개했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의 공비섬멸 작전(제1차: 1951.3.1.-4.10., 제2차: 1951.4.15.-5.25., 제3차: 1951.7.15. -8.15.) 지침에 따라 이 경사는 제1-제2차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7월 13일 10여 명의 공비들이 장수 계내면에 출현하여 치안을 교란하며 민간인을 대상으로 약탈행위를 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장수경찰이 출동했다. 이 경사와 동료 경찰들은 현장에 도착하여 곧바로 공비들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경사는 공비들을 격퇴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ㄷ-08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