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주(李德柱)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1009

공훈사항

이덕주 경사는 1925년 7월 9일 경남 충무읍 태평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남도경 소속으로 재직 중 산청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공부대는 7월 3일 한강을 도하여 경부가도를 따라 남진했다. 이 무렵 경남 서부지역과 호남지역에는 2-10명의 소규모 공비들이 출몰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와 횟수가 증가했다. 산청경찰은 오열 색출, 정보수집, 주요 보급로·시설 경비, 철도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했다.
7월 6일부터 이 경사가 포함된 720명의 경남·경북경찰이 부산-김천 간 철도경비 임무를 수행했으며, 7월 31일부터는 진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전북경찰, 전남경찰, 그리고 이 경사가 소속된 경남경찰은 혼성병력 4,000명으로 전투편성을 한 다음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면에 두고 미군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으로 제6사단과 대처했다.
경남경찰은 8월 12일 북한군이 통영으로 남진하자 마산에서 해상이동으로 통영에 상륙하여 원문고개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8월 13일 적의 선발대가 고성에 진입하자 경남경찰은 적을 격퇴하여 고성을 탈환했으나 곧바로 적의 증원 병력에 의해 통영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진동리로 철수했다.
8월 하순 경찰부대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열을 정비했다. 진동리지구에서는 경남경찰, 전남경찰, 전북경찰이 투입되어 미 제25사단의 방어진을 보강했다. 9월 1일 북한군이 마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자 미 제25사단과 경찰부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마산과 함안에서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9월 28일 산청경찰서를 수복한 산청경찰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200여 명의 공비들이 산청 일대에서 준동하고 있어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했다. 10월 9일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이 경사는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6-ㅁ-06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