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조(李德祚)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0475
  • 전몰일자 : 19501105

공훈사항

이덕조 일병은 1929년 3월 2일에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했던 1949년 9월 중순에 대전의 제2사단으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 후 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이덕조 일병이 부대에 배치되고 얼마 후 제2사단은 동년 11월 5일에 공비소탕작전을 위하여 안동지역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태백산 지구 일대에서 활동하는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하고, 1950년 4월 14일에 대전으로 복귀했다.
국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전 전선에 걸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방어체계가 붕괴되자, 육군총참모장은 방어계획에 의거 후방의 사단들을 전방방어지역으로 증원토록 조치했다. 제2사단은 신속히 의정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제7사단을 증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사단은 우선 이동이 가능한 제5연대를 투입했다.
이덕조 일병이 소속된 수색대는 사단 본부와 함께 26일 오전 11시에 의정부 남쪽 백석천에 투입되었다. 이미 국군 제7사단은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였고, 축차적으로 투입된 제5연대, 제16연대도 축석령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제25연대는 6월 27일 오전부터 창동방어선과 미아리 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다가 6월 28일 새벽에 신사동에서 한강을 건너 우면산-말죽거리로 철수했다. 수색소대는 적진에서 이동하며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과 연대에 제공했다.
제2사단은 우면산-남태령 방어선에서 7월 3일에 철수하여 평택으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7월 5일 부대를 재편성한 후 진천-보은 축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했다. 이후 제2사단은 7월 15일에 고은리와 문의 일대, 7월 19일에 회인과 보은에서 적을 저지했다. 7월 20일에 황간지역으로 이동했다가 7월 21일부로 사단이 해체되었고, 이덕조 일병이 소속된 수색대는 육군본부 경비부대로 전속되었다.
한편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일격에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때 미처 도망가지 못한 북한군은 의정부-포천-홍천 일대에서 아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이를 격멸하기 위해 육군본부는 제2사단을 재창설하기로 했다. 이덕조 일병은 10월 초 창설 요원으로 전속되어 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에서는 창설 준비와 더불어 잔적들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수색소대는 11월 5일에 사단 주요시설을 경계 중 소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습격을 받고 즉각적인 반격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7면-03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7-ㄷ-04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