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재(李德宰)

  • 군별 : 해군
  • 계급 : 이병
  • 군번 : 8111076
  • 전몰일자 : 19510120

공훈사항

이덕재 이병은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조국의 바다를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1949년 3월 31일 해군에 입대했다. 이 이병은 신병교육을 받고 1946년 8월 18일 창설된 목포기지에 배치되었다.
해군은 1949년 6월 1일 진해특설기지를 진해통제부로 개편하는 한편 각 해군 기지도 해군경비부로 개편했다. 인천, 목포, 묵호 기지가 이날 경비부로 승격되었고, 부산과 포항, 군산 기지는 1950년 4월 15일 경비부로 승격되었다. 각 경비부는 육상과 해상으로 경비 책임구역을 담당했는데, 목포경비부는 전라남도와 제주도 일대의 항만과 해상 경비 및 통제 임무를 수행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목포경비부는 사령관 정긍모 대령(제3정대 사령관 겸무) 예하에 이 이병을 포함한 병력 139명과 제3정대 소속 함정 6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남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이동했는데, 목포경비부는 7월 1일 대통령을 영접하고 YMS 514정에 탑승시켜 JMS 309정 호위하에 부산으로 안전하게 호송했다.
7월 중순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으로 남하함에 따라 목포경비부는 7월 20일 LST 단양호와 울산호를 이용하여 정부미 8만 가마를 부산으로 후송했다. 7월 24일 북한군 제6사단 일부가 목포 시내로 진입했다. 목포경비부는 시내 외곽 교량 2개를 파괴하고 YMS 505정, JMS 309정과 함께 목포항을 지키기 위해 적과 교전하였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외해로 철수했다. 목포경비부는 7월 27일 해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LST 단양호를 이용하여 대흑산도 근해에서 제1·3정대에 대한 보급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아군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적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수복하면서 목포경비부는 10월 10일 목포로 복귀했다. 이후 동 경비부는 항만 및 해상 경비·통제 임무를 수행하면서 목포 일대에서 활동하는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했다.
12월 31일 중공군 제3차 공세(신정공세)가 시작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37도선 일대로 철수했다. 이에 고무되어 목포 일대의 공비들이 준동했고, 이 이병은 1951년 1월 20일 공비소탕작전에 앞장서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재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9판-2면-09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ㄹ-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