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이(李德伊)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00887
  • 전몰일자 : 19501224

공훈사항

이덕이 일병은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30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뺏고 뺏기는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예비로서 위험지역에 투입준비를 하던 상황이었다. 9월 2일 개시된 북한군 9월 공세에서 제12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해 안강을 점령하고 경주를 목표로 남진했고, 3일 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경주 부근의 무릉산 일대에 곧바로 배치되었고, 이곳에서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지켜내고 13일 결국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비호산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연대가 비호산 전투에서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연대는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12월 3일 승호리 일대로, 6일 신계를 거쳐 시변리로 철수했고, 계속해서 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이 일병은 춘성군 오항리에서 진지 구축공사 중에 적 정찰대의 기습을 받고 12월 24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이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39면-2164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ㅂ-0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