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의(李德義)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66640
  • 전몰일자 : 19510107

공훈사항

이덕의 중위는 전라남도 광주시 학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섰다. 당시 예비역 중위였으나, 1950년 8월 30일 재소집되어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의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안강 일대에서 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 전투였다. 이는 단순히 방어전투라기보다는 핵심지역을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점령하는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였다.
이덕의 중위가 소속된 연대는 이후 계속된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다.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으며,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중위와 연대 장병들은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11월 하순경 백암-청진 선으로 진출하여 두만강 진출을 목전에 두었다. 27일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청진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부거로 진출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면서부터 이 지역에서도 북한군이 반격해 오는 등 서서히 적정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이 중위를 비롯한 연대 장병 모두는 용기백배하였다.
이덕의 중위를 비롯한 연대병력이 삼척으로 철수해 강릉 부근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중위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장병들에게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소대장이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장병들을 지휘해 공방전을 계속하며 투혼을 발휘했던 이덕의 중위는 1951년 1월 7일 삼척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의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2판-2면-92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ㄱ-04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