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의(이덕의)

  • 군별 : 육군
  • 계급 : 소위
  • 군번 : 206640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덕의 소위는 1930년 5월 9일에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 및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던 1950년 9월 18일에 부산 동래의 육군종합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한 후 11월 12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제2사단 직할부대인 공병대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제2사단은 11월 7일부로 국본 일반명령 제103호에 의거 서울에서 재창설되면서 제17연대와 신편 된 제31, 제32연대를 예속시켰다. 재창설 직후 사단은 지휘소를 서울에서 가평으로 이동하고, 제17연대는 철원, 제32연대는 의정부, 배속된 제5사단 제35연대는 구화리 일대에 배치시키고, 제31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되어 홍천 일대에서 후방교란 활동을 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유엔군의 주력이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할 때, 제2사단은 상급부대 명에 의해 12월 8일에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덕의 소위가 소속된 공병중대는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구축과 철조망 및 지뢰지대 설치 등 방어준비에 전념했다. 그는 공병소대장으로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위험한 일에 앞장섰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를 사수하며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이미 적은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며 포위 섬멸을 기도하자 다음 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청평으로 철수했다. 당시 이덕의 소위가 인솔하는 공병소대는 최후에 남아 교량 등을 거부하여 장애물을 설치하며 철수했으나, 이미 적들이 후방을 차단한 상태여서 전투를 실시하며 차단선을 돌파해야 했다. 그는 소대원들을 진두지휘하며 차단선을 돌파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며 차단선을 돌파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의 소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7판-7면-07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1-ㄲ-06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