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윤(利德潤)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5102574
  • 전몰일자 : 19500912

공훈사항

이덕윤 상병은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13일,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가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될 때, 그는 사단 직할부대인 통신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홍천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제2연대를 직접지원했다.
제2연대 장병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신속히 어론리 북쪽의 방어진지에 배치되었다. 장병들은 북한군 전차에 대항하여 특공조를 조직해서 파괴하고, 때로는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반격하는 등 공세행동으로 적 부대의 진출을 3일간이나 지연시켰다. 이후 제2연대는 6월 29일 홍천에서 철수하여 횡성-원주를 거쳐 7월 2일에는 충주로 이동했다. 이후 문경-함창-유곡-점촌 축선에 지연전을 수행하고, 8월 3일에 용기동∼교안동∼307고지를 연하는 능선의 낙동강 선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후 8월 12일 22시경에 북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국통산∼청노동을 잇는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8월 26일까지 국통산과 324고지, 169고지 일대에서 공세적인 방어로 진지를 확보했다.
이덕윤 상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8월 29일 오전에 제2연대 장병들과 함께 신녕에 도착하여 바로 화산 탈환을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제2연대는 먼저 중간목표인 228고지를 점령하고, 다음날 용암산을 탈취해 이를 발판으로 최종목표인 화산(828고지)을 공격했다. 통신소대는 사단과 연대 간에 통신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제2연대는 8월 31일에 적정을 고려하여 야간공격을 했다. 그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철수하여 예상외로 손쉽게 목표를 탈취했다.
북한군은 9월 2일에 국군 방어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9월 공세를 시작했다. 제2연대 장병들은 유엔군의 우세한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으나, 신녕 및 영천이 일시적으로 적에게 피탈되는 위기가 닥쳤다. 연대는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돌파된 지역에 대해 강력한 역습으로 회복하였다. 이덕윤 상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원활한 통신 소통 없이 승리는 없다’는 신조로 제2연대에 적극적인 통신 지원을 했다. 그는 9월 12일 전투에서 사단과 연대 간에 통신망 유지를 위해 출동했다가 적 침투부대의 습격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윤 상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8면-05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0-ㅁ-03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