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용(李德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53584
  • 전몰일자 : 19510513

공훈사항

이덕용 일병은 경상북도 김천시 용현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했던 1950년 9월 15일,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1사단 제9연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제11사단은 유엔군이 반격할 때에 후방지역작전을 위해 창설하기로 했다(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7호’). 이에 9월 25일부로 대구에서 사단본부를 편성하고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예하 부대로 편성했다. 이덕용 일병은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중순, 제9연대는 진주에 지휘소를 두고 지리산 동남쪽 지역에 대해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이덕용 일병이 소속된 제9연대는 점점 작전지역을 넓혀 11월부터는 남원, 광양, 단성 일대로 확대했다. 그리고 1951년이 되면서 함양, 광양, 거창 일대로 작전지역을 이동하며 적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장병들은 게릴라들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 근거지 파괴와 지도 인물 체포를 통해 게릴라의 재집결을 봉쇄한다는 목표를 두고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전과 달리 유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육군과 공군의 합동작전까지 전개했다. 특히 3월 17일 화학산 일대에서 게릴라들과 교전해 남해여단장, 부여단장, 참모장, 중앙감찰부장 등 거물 인사를 비롯해 86명의 게릴라를 사살하였으며, 3월 22일에는 순천을 습격한 게릴라들과 교전을 벌여 남로당 문화부장 등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결과 공비들의 세력 단위 활동은 소멸되었으나, 소규모 활동은 이어 갔다.
이덕용 일병이 소속된 제11사단은 4월 6일에 국군 제8사단에게 공비토벌작전 임무를 인계하고, 대구·경산 일대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을 한 후에 4월 중순에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이후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산군 4월 공세를 속초-간성 일대에서 저지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4월 25일부터 철수하여 양양 북방의 대포리를 잇는 선에서 저지했다. 이곳에서 제11사단 장병들은 공산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하고, 5월 3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하여 마등령-저항령-989고지 방향으로 인접부대인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하여 5월 11일에 목표를 탈취했다. 이곳에서부터 적들은 도망가지 않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5월 13일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52묘역-2판-2688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3-ㅅ-03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