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영(李德永)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8807913
  • 전몰일자 : 19521103

공훈사항

이덕영 일병은 1929년 5월 6일에 충청북도 충주군 주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3월 15일,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 병으로 분류되어 제7사단 제1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덕영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기 전, 미 제7사단은 부족한 병력을 카투사(KATUSA) 병으로 대부분 보충하였고, 1950년 9월 미 제10군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이후 북진 시에 함경남도 이원으로 상륙하여 혜산진까지 진출했었다. 이후 흥남철수작전으로 부산으로 상륙하여 재편성과 부대정비를 한 후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38도선 상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1951년에 접어들면서 미 제9군단 소속으로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가평-춘천-화천-김화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후 1952년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덕영 일병이 전입했던 시기인 1952년 5월 초순, 미 제7사단은 철원평야 동쪽의 중가산에서부터 김화 북쪽 하감령에 이르는 지역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한편 중공군 제45사단은 오성산에서 김화로 뻗어 내린 능선에 위치한 저격능선(580고지)과 삼각고지(598고지)에 전초를 운용했다. 이 전초는 아 진지를 감제 관측할 뿐만 아니라 김화 방어에도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에 유엔군사령부 차원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 고지에 대해 공격하기로 했다.
미 제7사단은 1952년 10월 14일부터 국군 제2사단과 함께 김화 북방 7㎞ 지점에 위치한 삼각고지 및 저격능선에서 중공군 제15군단과 공방전을 벌였다. 쌍방간에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면서 인명피해는 날로 늘어만 갔다. 이에 사단은 삼각고지를 탈취했으나 인명피해가 많아 고심 끝에 이를 10월 25일에 국군 제2사단에게 넘겨주었다. 이덕영 일병이 소속된 미 제17연대는 방어진지 강화와 수색작전에 중점을 두고 운용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1월 3일에 방어지역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55묘역-6판-3605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0-ㄹ-10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