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수(李德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5204647
  • 전몰일자 : 19501201

공훈사항

이덕수 상병은 경상북도 경산군 남천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초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 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덕수 상병은 임진강 도하저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 무렵 북한군은 임진강을 도하 한 후 문산-서울 축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사단 일부에서는 대전차 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7월 4일 새벽 같은 시간에 공격을 개시, 금곡리 부근으로 밀어붙이고 풍덕천-수원 도로를 따라 남진하였으나 국군 제1사단은 한때 이들을 일제사격으로 격퇴하였다.
이 상병이 소속된 사단은 8월 초부터 고령에서 함창에 이르는 낙동강 전선에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큰 수훈을 세웠다. 쌍방은 가산을 탈환하고자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덕수 상병과 사단 병력은 충북 보은지구에 잔류하여 잔적을 소탕한 후 10월 7일 이동을 개시하여 안성-서울을 거쳐 10월 10일에는 임진강 북안의 고랑포로 진출하였다. 사단은 10월 30일 온정을 경유하여 초산으로 공격하여 11월 1일 오후까지 공방전을 펼친 후 입석리로 이동하였다.
11월 28일 이 상병과 장병들은 태천 외곽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박천 북쪽의 중막동-용산동 선을 점령하였고, 다음날(29일) 박천-용산동 일대를 고수하기 위하여 총력을 다 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증원부대를 투입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단은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면서 박천 남쪽의 동이동으로 철수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이덕수 상병은 1950년 12월 1일 평원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수 상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4판-3면-23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2-ㄱ-07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