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문(李德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23456
  • 전몰일자 : 19511009

공훈사항

이덕문 일병은 1932년 7월 1일에 경상남도 사천군 용문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할 때인 1950년 11월 29일에 부산에 설치된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덕문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안동-속리산-제천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1951년 4월 초까지 후방지역 소탕작전을 마무리하고 4월 28일에 청평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그가 소속된 사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작전에 참가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춘계공세(4월, 5월)를 서울 북방-마석-용문산-홍천-하진부리-대관령-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덕문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군단계획에 따라 적의 주력부대와 예비대가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섬멸하기 위하여 최대한 신속히 반격하기로 했다. 이에 사단은 5월 20일을 기해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하고, 5월 24일 오전 7시에 일제히 공격했다. 일명 가평-화천 진격전을 실시한 것이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계속된 수세에서 벗어나 38도선을 향해 일제히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미 제9군단은 5월 31일까지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잇는 와이오밍 선을 확보했다. 제17연대 장병들은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통로의 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하여 6월 14일에 적근산(1073고지)을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한 유엔사령부의 작전지침으로 8월 2일에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피아간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그리고 아군의 공격으로 9월 1일부터 시작하여 3일까지 격렬한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이후에는 전선은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정찰 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이덕문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10월 10일에 방어진지 전방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전투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4869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ㅁ-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