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만(이덕만)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5704596
  • 전몰일자 : 19510106

공훈사항

이덕만 일병은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광복 후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가운데, 1949년 8월 초순경 육군야전포병학교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본 직할인 포병연대로 배치되었다(*전사자 명부에 입대일자 1950년 8월 2일은 포병학교가 임시폐교 되었으므로 오류로 추정). 육군포병연대는 1949년 10월 15일부로 육군포병학교로 개칭되어, 6·25전쟁 발발 전까지 38도선 상의 산발적인 교전에서 적 기도분쇄와 포병 전투력 향상을 위해 전력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덕만 일병이 소속된 포병학교 제2교도(포병)대대는 1950년 6월 26일 새벽 1시부로 제2사단에 배속되었다. 제2사단(제5연대)은 6월 26일 새벽에 축석령 지역에 투입되었고, 제2포병대대는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6월 26일 아침에 의정부 북방 상금오로 이동하여 포를 방열하고 자일동 부근의 적을 향하여 집중포격을 가했으나, 105mm 야포의 화력도 북한군 T-34 전차의 진출을 막지 못했다.
한편 다만 적 전차의 기동이 공격 진로의 차단으로 인해 한동안 지체되자 제2포병대대는 전 화력을 집중하여 사격했다. 이에 북한군은 위협을 느껴 다시 축석령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제2포병대대는 6월 27일 창동방어선 전투에서 포격전을 실시하다가 6월 28일 새벽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포를 파쇄하고 한강을 건너 철수했다. 이덕만 일병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의 포격에 의해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12월 초 건강이 회복되어 제5사단에 11월 26일부로 예속 변경된 제26포병대대로 재배치되었다.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38도선으로 철수하던 상황에서, 제5사단은 12월 13일부터 춘천 북방 38도선 일대의 전선 방어(탑두울-배후령)에 투입되어 방어편성을 했다. 사단은 1951년 1월 1일 새벽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받고 후방을 차단당하였으며, 다음날 밤 포위망을 돌파하여 가평을 거쳐 문막 동쪽으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0사단 병력들이 제천-단양-안동까지 침투하자 사단은 문막 일대에서 제천-영월로 방어 배치를 전환하여, 영주 지역에 침투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부대들을 격멸했다. 이덕만 일병은 포반원으로서 1월 6일 영주 지역의 북한군 집결지에 화력을 지원하다가 기습 침투한 적 침투부대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만 일병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872 국)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3판-39면-2163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4-ㅌ-01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