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덕규(李德珪)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76957
  • 전몰일자 : 19511017

공훈사항

이덕규 일병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던 1950년 12월 15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덕규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하순, 제6사단은 장호원 북방의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2월 21일부터 반격(일명 '킬러작전')으로 전환했다. 당시 제6사단은 횡성 방향으로 공격했고,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3월 13일에 용문산(1157고지)과 홍천강을 점령하고, 3월 20일에는 북한강 남안(당시 춘천 서남쪽 6km인 의암리와 가평 간)까지 진출했다. 이후 중공군의 4월 공세와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하여 가평-춘천 사이의 산악지대인 계관산-북배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5월 28일에 구만리발전소(현 화천수력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지역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6월 5일부터 철의 삼각지대인 김화 및 철원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덕규 일병이 소속된 제7연대는 사단의 주공으로서 백암산에서 화천으로 뻗어 내린 643고지-887고지-992고지-취봉 방향으로 공격했다. 10일까지 계속된 공격에서 취봉을 확보하고,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자, 유엔군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하고 각 부대에 진지 전방에 대한 공세행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제6사단은 우선 방어진지 전방의 주요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하고,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교암산을 탈취하기로 했다. 이덕규 일병이 소속된 제7연대가 10월 13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21일까지 치열한 전투로 중공군을 대파하고 교암산-송설리-송동리까지 진출했다. 그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던 10월 17일에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덕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5457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ㄹ-05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