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훈(李大勳)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10585
  • 전몰일자 : 19510516

공훈사항

이대훈 중위는 1918년 12월 8일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자 일어섰다. 이 중위는 사병으로 복무하다 장교를 지망했고, 1951년 2월 15일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여 제7사단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1·4 후퇴를 단행하여 37도선 일대로 철수하여 적과 공방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7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연대는 횡성 동북방의 창동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강원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유엔군의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가 소속된 제3군단은 조공으로 공격을 했고, 연대는 3월 6일 하진부리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연대는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이후 연대는 지역 내 잔적을 소탕하면서 속사리-창촌-현리 방향으로 계속 진격하여 3월 하순에는 인제군 현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4월 초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연대는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신풍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 변의 신풍리 일대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이 중위는 소대원을 독려하여 끝까지 진지를 지켜내며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5월 16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훈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92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ㅇ-05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