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훈(李大熏)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26

공훈사항

이대훈 순경은 1921년 8월 28일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경무과 소속으로 재직 중 서울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6월 26일 의정부가 점령되어 서울이 위협을 받게 되자 서울시 비상경비총사령부 산하 경찰병력 7,000여 명이 서울 방어를 위해 서울 외곽에 배치되었다. 6월 30일 적 1개 대대가 김포로부터 오류동을 목표로 공격을 하자 7월 1일까지 전투가 벌어졌고, 아 측의 군경부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방어진지를 고수했다.
7월 3일 적은 17대의 전차로 경인가도에 진출하여 도로를 차단하자 영등포를 비롯한 오류동의 아군 방어선이 무너져 서울경찰은 부대별로 수원으로 퇴각했다. 7월 4일 수원을 점령한 적은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이에 비상경비총사령부는 서울경찰(200명)과 충남경찰(300명)을 제1대대, 경기경찰(300명)을 제2대대로 편성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7월 10일 예산 방면에서 적이 남진 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제1대대(서울경찰)는 운곡지서 대원들과 합동으로 매복작전을 하여 적 20명을 생포했다. 7월 15일 제1대대(서울경찰)가 대천 동쪽 능선에서 적 수십 명을 발견하여 3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9월 15일 개시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시에 진입하여 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할 무렵 이 순경은 9월 22일 서울로 복귀했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포위하고 적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했고, 적 주력은 의정부와 동두천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나 상당수의 적이 여전히 서울 시내에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 순경은 서울시 관내 경찰서 수복을 위한 준비와 주민을 통한 첩보수집,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하던 중 9월 26일 수 명의 적이 마포경찰서 부근에 출현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 후 수 명의 적을 발견하고 적을 격멸하던 중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훈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1면-08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ㅎ-05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