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홍(李大鴻)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818

공훈사항

이대홍 경사는 1929년 2월 25일 전북 순창군 순창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순창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함안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전북도경은 비상경비체제로 전환하고 도내 관할 경찰관서로 하여금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했다. 순창경찰은 주요 시설 경비와 순창-남원, 순창-담양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하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전주를 점령한 적이 7월 24일 남원으로 남하함에 따라 남원의 민기식 부대 등 군 일부 병력은 함양으로, 일부는 구례로 이동하였으며 경찰은 운봉으로 집결했다. 운봉(남원시 운봉읍)에 집결한 전북경찰 300명은 전북국장 지휘하에 군병력 500명과 합동작전으로 남원탈환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육십령으로 철수했다.
육십령의 전북·경남부대의 저지선은 1개 연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져 일부는 안의로 후퇴하고, 일부는 산복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이후 경찰부대는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진함에 따라 산청을 거쳐 진주로 후퇴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자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31일 의령으로 철수했다. 합천으로 집결한 충남·서울·전북병력은 7월 31일 일부는 고령으로, 일부는 창녕으로 낙동강 동안으로 이동했으며, 의령의 경남·전남병력은 함안-마산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일역을 맡게 되었다. 순창경찰은 8월 4일 함안에 도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낙동강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8월 18일 북한군의 공격에 따라 피·아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이 경사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홍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ㅎ-02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