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학(李大學)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2100254
  • 전몰일자 : 19500905

공훈사항

이대학 이등상사는 1928년 7월 21일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월 25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제1군단에 배치되었다.
이대학 이등상사가 38선 일대 주요 시설 경계에 임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38도선에 배치된 장병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지만 T-34 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본부를 수원 농업시험장으로 이동 개설한 후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대학 이등상사는 7월 13일 제1군단 병력과 청주-보은-미원 간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은 갈령. 화령장. 이화령. 조령. 죽령에서 소백산맥을 신속히 돌파하고 상주와 안동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괴산에서 부대정비를 마치고 16일 미명 미원 북방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부흥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이대학 이등상사와 군단 장병들은 적으로부터 포위 위협을 받아 한때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거리고개에서 적의 진출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고 저지하였으며, 다음날에도 전차 3대와 장갑차 12대로 전력을 증강하여 공격을 재개한 적을 격퇴하였다.
왜관 북동쪽의 제1군단 병력도 7월 31일과 8월 1일 야음을 이용하여 낙동강 남안으로 이동하여 도하 철수를 개시하였다. 이 이등상사와 군단 장병들은 군단작명에 따라 안동에서 수도사단의 엄호 아래 안동대교를 건너 그 남쪽에 진지를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촉박한 명령 전달과 수도사단의 엄호 미비로 인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도하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 이등상사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언제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용맹을 발휘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대학 이등상사는 1950년 9월 5일 경주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학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24묘역-5판-831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77-ㄱ-08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