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진(李大鎭)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206

공훈사항

이대진 순경은 1929년 11월 20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장성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장성경찰서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장성경찰은 장성-고창, 장성-정읍, 장성-담양을 잇는 군 주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남경찰국은 각 서(署)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전북경찰국에 배속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했으며, 장성경찰서 병력도 전투경찰로 재편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20일 전주를 점령하고 잠시 부대를 정비한 후 7월 22일 공격을 재개했다. 북한군 제13·제15연대는 국군과 경찰의 저항을 뚫고 7월 23일 장성·광주를, 7월 24일에는 화순·나주·장흥을 관통하여 보성 방면으로 진출했고, 제1연대는 7월 24일 남원을 점령 후 구례-순천으로 남진했다. 장성경찰은 지연전을 펼치며 곡성-광양을 쳐 7월 31일 진주에 도달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7월 31일 진주에서 경남경찰, 전남·전북경찰 혼성병력 4천여 명으로 전투부대를 재편성했고, 경찰부대는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8월부터 9월까지 이 순경이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성·창원·함안·진동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면서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장성경찰은 10월 6일 장성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 오열 색출, 잔적소탕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순경은 제1차-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52년 2월 6일 야간에 10여 명의 공비들이 장성경찰서를 습격하자 장성경찰서 요원들과 적들 간 약 30분 동안 교전이 벌어졌다. 이때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진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00-ㅅ-02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