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유(李大有)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위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523

공훈사항

이대유 경위는 1912년 2월 18일 전남 광산군 지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7년 3월 25일 경찰에 입문했으며, 전몰 당시 광산에서 전사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광주경찰은 아군이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오열 색출, 정보수집, 주보급로 경비, 철도경비, 치안유지,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7월 23일 북한군이 전차 6대를 앞세우고 정읍을 거쳐 광주로 진격했다. 아군 군경부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후퇴했으며, 광주경찰은 화순-순천을 거쳐 하동으로 기동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7월 31일 진주에서 경남경찰, 전남·전북경찰 혼성병력 4천여 명으로 전투부대를 재편성했고, 경찰부대는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8월부터 9월까지 이 경위가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성·창원·함안·진동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광주경찰은 화순-순천을 거쳐 하동으로 기동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7월 31일 진주에서 경남경찰, 전남·전북경찰 혼성병력 4천여 명으로 전투부대를 재편성했고, 경찰부대는 미 제25사단 및 한국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8월부터 9월까지 이 경위가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성·창원·함안·진동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광주경찰은 10월 초 광양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차(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에 걸쳐 공비섬멸 작전기간을 선정하였으며, 이 경위는 제1-제2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이 경위는 광주에서 치안유지, 주요시설 경비, 오열 색출, 공비소탕 임무를 수행하다가 5월 23일 광산에 출현한 공비소탕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날 이 경위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유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9-ㅎ-08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