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원(李大源)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50100
  • 전몰일자 : 19510829

공훈사항

이대원 일병은 1926년 2월 17일 경상북도 경주군 서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22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의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안강 일대에서 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 전투였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였다.
이대원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와 연대병력이 삼척으로 철수해 강릉 부근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대원 일병과 장병들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그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6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연대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6월 3일 오후 3시에 북한군 1개 중대 규모가 선제 기습공격으로 이 일병과 연대병력이 방어하고 있던 칠절봉 부근 주저항선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어 9일과 10일에도 북한군의 공격은 향로봉 부근으로 계속되었으나 그와 연대병력은 그때마다 화력을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이후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하였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대원 일병은 1951년 8월 29일 간성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원 일병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2898 육)을 추서하고 위패(03판-3면-10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05-ㅍ-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