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운(이대운)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2466
  • 전몰일자 : 19500920

공훈사항

이대운 중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하순, 부산 동래고등학교에 설치된 육군제병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9월 17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바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배치되어 교관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초급장교의 보충문제는 심각했다. 육군사관학교는 7월 8일에 임시 폐교되었고, 생도 1기는 7월 10일부로 소위로 임관시켰다. 육군은 8월 15일부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보병학교를 합병하여 부산 동래고등학교에 육군보병학교로 설치했다. 이는 8월 21일에 육군제병학교로 개칭하여 8월 23일에 200명의 후보생이 입교했다. 그리고 9월 7일부로 육군종합학교로 개칭되어 9월 1일부로 1기생이 입교하여 10월 15일에 육군소위 임관했다.
이대운 중위가 제1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으며, 훈련소는 창설 직후로서 신병교육과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대구 지역은 1948년 11월 제6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는 등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활동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나 보현산 등을 근거지로 하여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육군 제1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그러던 중 9월 20일에 대구 인근에서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대운 중위가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소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운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92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ㅍ-05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