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대석(李大碩)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825

공훈사항

이대석 순경은 1926년 3월 15일 전북 정읍 내장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북도경 정주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함안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군경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정주경찰은 정주-부안, 정주-전주, 정주-임실을 잇는 주요 도로 통제와 군산항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전북경찰국은 비상경비총사령부 지시에 따라 각 서(署)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충남지구의 지연전에 참가하도록 조치했고, 잔여 경찰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에 대비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호남지역에 투입되어 7월 16일 금강을 도하하고 곡성-전주 방향으로 남진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편 제7사단(제3연대·제9연대)과 경찰을 배속하여 지역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북한군은 7월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어서 7월 20일 곡성을 점령했고, 그 중 일부 부대는 김제로, 일부는 전주로 남하함에 따라 전북도경은 이날 남원으로 철수했다. 7월 20일 전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남원에 집결한 전북도경과 전북 북부지역 경찰은 임실 방면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군부대와 합동 방어태세를 갖추고, 운봉에 진출한 함양경찰 병력과 합세하여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7월 26일 육십령에서 전북·경남부대의 저지선은 1개 연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무너져 일부는 함양군 안의면으로 후퇴하고, 일부는 함양군 석복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어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명은 7월 31일 의령으로 철수했다. 합천으로 집결한 충남·서울·전북 경찰병력은 7월 31일 일부는 의령으로, 일부는 창녕으로 이동했으며, 의령의 경남·전남 경찰병력은 함안-마산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선작전에 참여했다. 이 순경의 소속부대는 8월 4일 의령에서 함안으로 이동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임했다. 8월 25일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이 순경은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대석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경찰2묘역-505판-387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7-ㄱ-02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