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달원(李達源)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156737
  • 전몰일자 : 19510309

공훈사항

이달원 이병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 이병은 1950년 11월 29일에 입대한 후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8사단 제2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병이 부대에 전입했을 당시, 제21연대 장병들은 38도선의 바로 북방에 위치한 연천으로 집결하기 위하여 3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1950년 12월 9일 토산을 출발했다. 제8사단은 수나 장비가 열세한 와중에 경기도 연천 부근의 요충지인 520고지를 향하여 돌진했다. 또한, 제21연대는 520고지 일대 능선에서 각각 배치되어 산병호를 구축하고 날이 저물어도 사주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제21연대 장병들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북한군과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직면했다. 제8사단은 당시의 혹한과 강설로 진지 구축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적의 주 접근로에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제8사단 장병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좌·우측 전선이 돌파되었기에 강원도 홍천군 방면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했다. 제21연대 장병들은 목계리를 경유 황강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에 임했다.
제21연대를 비롯하여 사단과 소속 연대들은 1951년 2월 4일부터 집결과 함께 진격을 개시했다. 아군과 적군은 고지 선점을 위한 수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수도고지를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중공군의 유인책이었으며, 1951년 2월 11일부터 중공군 제4차 공세가 전개되었다. 제21연대를 포함하여 사단과 모든 연대는 중공군에 고립된 채 후방이 포위되었다. 제8사단은 결국 소부대로 분산되며 철수하게 되었다.
적군의 4차 공세로 제8사단의 장교 약 300여 명과 사병 약 7,000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되고 남은 인원은 3,00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에 제21연대를 비롯하여 사단 각각의 연대는 서로 다른 곳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하면서 북한군의 기습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해 후방지역 경계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이병은 후방지역 경계임무 도중 1951년 3월 9일 적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달원 이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03판-6면-20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1-ㅇ-08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