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달영(李達永)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6598
  • 전몰일자 : 19530201

공훈사항

이달영 일병은 경기도 인천시 중앙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38도선 일대에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던 1951년 1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7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달영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2월 중순, 미 제7사단은 평창과 원주 사이에 위치한 백운산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2월 1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22일 야간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4월 공세’,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를 맞아 철수와 반격을 반복하다가 홍천 남서쪽 일대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5월 23일부터 반격하여 춘천-화천 방향으로 진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을 점령하고, 6월 13일에는 적근산-주파령을 잇는 선까지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1952년도까지 계속되었다.
이달영 일병이 소속된 미 제7사단은 3월 중순부터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중서부전선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은 1952년 7월부터 12월까지 중공군 4개 군단과 주요 전초진지를 서로 점령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수행했다. 중공군은 1952년 여름부터 먼저 수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며, 첫 번째로 미 제9군단의 서측방에 위치한 백마고지에 대해 공격했다.
한편 미 제9군단은 전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더 강력한 공격하기로 하고, 10월 14일 새벽 5시에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쇼다운작전’을 개시했다. 군단 예하 16개 포병 280문의 야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으며, 이후 미 제7사단 제32연대가 먼저 삼각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이명암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가 10월 16일에 재차 공격하여 정상인 598고지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역습으로 10월 19일 상실했다. 연대는 10월 22일에 삼각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이 지역을 10월 25일부로 국군 제2사단에 인계했다.
이후 사단 장병들은 주로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이러한 상황은 1953년까지 계속 되었고, 이달영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2월 1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달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9판-5면-06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ㄷ-0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