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다용(이다용)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353239
  • 전몰일자 : 19520626

공훈사항

이다용 하사는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명동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던 1950년 12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다용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하순, 제6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전곡 일대에서 철수하여 장호원 부근의 판부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단은 중공군의 2월 공세와 춘계 대공세(4월 및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6월 15일에 백암산 일대를 확보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공산군이 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군사력 증강에만 몰두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하고, 각 부대에 제한된 공격작전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제6사단은 유엔사의 작전지침에 의거 공세행동을 하기로 했다. 사단 장병들은 두 차례(10월 금성천 부근전투, 11월 949고지전투)에 걸친 공격작전으로 백암산 전방의 전초기지들을 확보하여 금성천 분지를 확보했다. 아울러 유엔사가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갖는데 기여했다. 사단은 1952년 1월 10일부로 미 제9군단에서 배속해제 되어 사단과 함께 양구 일대에서 야외기동훈련을 하다가 3월 22일부로 미 제9군단에 다시 배속되어 김화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40사단으로부터 방어진지를 인수했다.
이다용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를 전방연대로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잇는 주진지를 점령하고, 제19연대는 예비로 죽동에 위치했다. 그가 소속된 제7연대는 교암산 일대를 점령하고 있다가 5월 22일에 제19연대에 방어진지를 인계하고, 연대는 사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정비 및 수색작전 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소대는 6월 26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분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다용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116-ㅅ-07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