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노호(李노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01139
  • 전몰일자 : 19520708

공훈사항

이노호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이 이등중사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이등중사는 1951년 6월경에 입대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으로 전입되었다가 육군의 부대조정에 의거해 제9사단 제28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등중사의 부대 전입 당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제9사단은 5월 29일부로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포천으로 이동해 와이오밍(Wyoming)선 (캔자스선 북방 20km 내외의 철의 삼각지대를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중공군 제65군 예하 제165사단과 격전 끝에 고대산을 확보했다.
이어 사단은 철의 삼각지 확보에 중요한 감제지형인 김화읍 계웅산 전투에 투입되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6월 28일에 동 고지를 확보한 후, 계속되는 적의 역습을 격퇴했다. 사단은 1952년 전반기까지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전투정찰과 수색·매복작전 등을 지속하였다. 이후 국군 제2군단이 1952년 4월 5일에 재창설되어 전선에 투입됨에 따라 전선이 조정되어 사단은 미 제9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사단의 좌전방에 배치된 연대는 1952년 4월 19일에 사단 정면에 위치하여 아군의 관측과 기동에 제한을 주던 300고지를 기습했다. 연대는 적의 방어시설을 파괴하고 적병 일부를 사살 후 철수했다.
이후 김화지구에서 전초 쟁탈전과 포로획득전, 전투정찰을 지속했다. 연대는 1952년 6월 21일에 대규모의 포로획득과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중공군 1개 연대 병력 3,5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사단 정면의 500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격화되었다. 사단은 10월 6일부터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제112사단과 12차례의 백병전이 거듭되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사단은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철의 삼각지 서남부에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이 이등중사는 수색작전 중 적탄에 맞아 1952년 7월 8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노호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9-ㄹ-02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