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내섭(이내섭)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2886
  • 전몰일자 : 19520620

공훈사항

이내섭 대위는 경상남도 부산시(現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1가 104번지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년 12월 하순경 모집한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교하여, 군사훈련과 초급간부로서 필요한 리더십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이내섭 대위는 제8기생 중 3차로 1949년 3월 2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충청남도 온양에 위치한 제13연대로 배치되었다. 연대는 6·25전쟁 발발 전까지 인근 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북한군의 공격 징후가 짙어질 무렵인 1950년 6월 중순경 이내섭 대위는 제5사단 사령부로 전속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5사단은 제15, 20연대가 제1사단 장병들과 함께 문산 및 봉일천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력의 차이로 인해 1950년 6월 28일에 한강을 건너 철수했다. 이때 이내섭 대위는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초순경 회복하여 제5사단 사령부로 재배치되었다. 당시 제5사단은 1950년 10월 8일 재창설 후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할 때인 10월 13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영남 일대의 적 패잔병 및 게릴라 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단은 춘천-가평-횡성-영주-안흥 일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1951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와 2월 공세를 막아냈다. 이어서 사단은 태기산 전투(3월), 인제부근 전투(4월)에서 적을 격퇴하며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그리고 중공군 5월 공세 때 적의 종심기동을 저지하면서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美 제10군단의 강원도 양구 일대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 시, 군단에 배속된 사단은 가칠봉 전투에서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혈전을 벌인 끝에 가칠봉과 서희령을 굳건하게 지켜냈다. 사단은 이 전선을 10월 20일부로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하여, 1952년 1월 12일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하면서 수색정찰과 매복 작전을 병행했다.
그 후 사단은 제1군단 배속으로 1월 23일부터 동해안 거진 일대 554고지-351고지-감호 일대를 잇는 방어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선은 7월 초순까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내섭 대위는 6월 20일 강원도 거진 일대 방어진지에서 사단 작전장교로 방어 작전계획을 검토 중 적 침투부대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내섭 대위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2판-1면-28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4-ㅊ-06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