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낙운(李洛雲)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7105
  • 전몰일자 : 19500725

공훈사항

이낙운 일병은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7월 5일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낙운 일병은 진천 북단 백곡천에 투입되었다. 진천-청주 축선은 중서부 지역에서 대전 또는 보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접근로이며, 이 축선에서의 작전은 서측의 경부축선상의 작전에도 큰 영향을 주는 중요 축선이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7월 8일 아침 적 제2사단의 전차를 동반한 압도적인 공격을 받아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잣고개로 물러났으며, 진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수차례의 교전 끝에 청주로의 진출요지인 문안산-봉화산 일대를 점령당하였다. 공격부대는 일제히 사단장의 진두지휘에 따라 적의 탄막지대를 돌파하면서 부대정비 중이던 적을 공격하였고, 마침내 원래 사단의 주저항선인 봉화산, 문안산을 회복하였다.
이후 이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10일 저녁 청주의 미호천 남안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진지를 급편성하였다. 사단의 철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적 제2사단은 양천산을 경유하여 남진한 후 11일 아침 무렵 미호천 북방까지 진출하였다. 미호천 교량을 폭파한 후 진지보강에 주력하고 있던 수도사단은 적의 선두부대가 접근하는 즉시 야포로써 제압하고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적 집결지를 강타하고, 다음날에는 군단 포병의 지원을 받아 적의 예상집결지를 집중사격하는 등 적의 공격을 철저히 분쇄하였다. 이후 이 일병과 장병들은 13일에 미호천에서 접적이탈을 단행하여 청주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그는 전투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위기에 처한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낙운 일병은 1950년 7월 25일 안동 부근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중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낙운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4판-7면-10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2-ㅊ-05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