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길용(李吉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8815393
  • 전몰일자 : 19530704

공훈사항

이길용 이등중사는 경상북도 대구시 대명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4월 2일,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 병으로 분류되어 제7사단에 배치되었다.
이길용 이등중사가 전입했던 때, 미 제7사단은 철원평야 동쪽의 중가산에서부터 김화 북쪽 하감령에 이르는 지역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반면 중공군 제45사단은 오성산에서 김화로 뻗어 내린 능선 상의 고지군에 전초진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 중 상감령 동쪽과 서쪽에 저격능선(580고지)과 삼각고지(598고지)의 전초는 아 진지를 감제 관측할 뿐만 아니라 김화방어에도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에 유엔군사령부 차원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두 고지에 대한 공격을 하기로 했다.
이길용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7사단은 1952년 10월 14일부터 김화 북방 7㎞ 지점에 위치한 삼각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에 중공군 제15군단 예하 부대들이 역습으로 다시 빼앗고자 했다. 이후 쌍방 간에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사단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에 약 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목표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제7사단은 군단장 명에 의거 삼각고지의 작전지역을 10월 25일부로 국군 제2사단에게 넘겨주었다.
미 제7사단은 1953년 초 진지를 강화하며 탐색과 소부대전투만을 반복하는 가운데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회담도 중단된 상황에 있었다. 한편 중공군은 공세역량을 강화한 후에 3월 23일에 미 제7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역곡천 남안의 불모고지(275고지)와 포크찹고지에 대해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길용 이등중사는 미군 장병들과 함께 역습으로 고지를 탈취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길용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7사단은 유엔군의 군사전략에 의해 군사작전의 확대를 스스로 억제함으로써 수세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중공군은 휴전을 직전에 둔 7월에 공세 행동을 하되, 공격목표는 전투력이 약한 국군 사단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미 제7사단 장병들은 전투가 없이 적에 대한 수색작전만 강화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7월 4일에 방어진지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길용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6판-7면-16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ㅌ-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