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길영(이길영)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10713
  • 전몰일자 : 19511005

공훈사항

이길영 중위는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조국과 자유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장교가 되기 위해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고등학교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단기간의 교육을 받고 1951년 2월 17일 소위로 임관하여 제5사단 통신대로 전속되었다.
이길영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일명 2월 공세)을 받고 방어진지에서 철수를 개시하였으며 점령하여야 할 원주-평창선보다 남쪽으로 계속 철수하여 제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계속해서 사단은 사단은 1951년 3월 3일에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강원도 횡성 일대 태기산(1261고지) 전투(3월), 소양강-인제지역 전투(4월), 홍천북방지역 전투(5월), 현리-서화지역 전투(6월) 등에 참가하여,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며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으로 진격하면서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8월 초순 경에 사단이 배속된 美 제10군단은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이길영 중위가 소속된 제5사단은 8월 31일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3일 서희령을 탈취했다. 이어서 사단은 美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을 인수받아 최초 제27연대를 주력으로 1,211고지를 9월 9일 최초 점령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가칠봉으로 철수했다.
그 후 사단은 10월 1일에 사단 총공격으로 1,211고지를 2차 점령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철수했으며, 다시 10월 8일에 제27연대가 공격하여 3차 점령하였으나 또다시 적의 역습으로 철수했다. 이와 같은 혼전 속에서 이길영 중위는 통신소대장으로서 1,211고지를 2차 점령 후 적의 역습에 의해 가칠봉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던 중, 1951년 10월 5일 통신망 확립을 위한 사단 통신망을 작성하여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 침투부대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길영 중위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26049 육)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5묘역-5판-17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4-ㄲ-05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