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흠(이기흠)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2300483
  • 전몰일자 : 19501104

공훈사항

이기흠 이등중사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월 12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이기흠 이등중사는 연대 장병들과 함께 개성 일대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진지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면서 전면전이 되고 말았다. 기습남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긴급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으로 낙동강까지 철수한 후 8월 초 포항으로부터 안동-영천-신령-칠곡-현풍-창녕-마산을 잇는 200㎞ 길이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기흠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8월 12일부터 다부동-군위 일대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13일 다부동 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연대는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 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여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미쳐 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이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전차 7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기흠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9월 28일 서울 수복작전에 기여하고 9월 말 38도선에 도달하였다. 10월 9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해 19일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기습공세가 시작되었다. 10월 23~24일 안주 일대에서 청천강을 도하 한 후 25일 운산에 도착한 이 이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25일 오전 10시 30분에 운산에서 수풍호로 진출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기흠 이등중사는 1950년 11월 4일 운산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흠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7면-351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0-ㅁ-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