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훈(이기훈)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616485
  • 전몰일자 : 19511009

공훈사항

이기훈 일병은 1928년 3월 5일에 함경북도 북청군 덕음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던 1951년 5월 중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이기훈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의 전황은 중공군 5월 공세 이후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은 군사작전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1951년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열렸으며 이에 양측은 대규모작전을 자제했고, 전쟁은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모되는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美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통 북방 서화리 일대의 新캔자스선(후덕리-981고지-산두곡산을 잇는 선)을 확보 후 적과 대치 중에 있었다. 그 후 사단은 8월 초순 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현리 일대에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면서 주변 지역 수색정찰을 강화하고 있었다.
8월에 접어들면서 美 제10군단은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사단은 8월 31일 가칠봉 북쪽의 1,211고지와 서희령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여 9월 4일에 제27연대를 주력으로 사단목표인 가칠봉 동북쪽 능선과 서희령을 점령했다.
사단의 공격목표인 1,211고지는 가칠봉에서 큰 계곡 건너 서북방에 우뚝 솟은 감제고지로서 사단 방어선을 완전히 감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피의 능선과 그 북방 931고지 동측방에 위협이 되는 고지였다. 그리하여, 이기훈 일병의 제5사단은 9월 5일부터 10월 9일까지 연대별로 또는 3개 연대로서 1,211고지를 공격하여 세 번씩이나 목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때마다 적의 반돌격에 이를 상실하고 결국 10월 14일에 가칠봉 부근 전투를 종결했다.
비록 1211고지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사단은 끈질긴 전투로 박달고개-가칠봉-서희령 전선을 굳게 지켜 해안분지(펀치볼)확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10월 20일에 이 전선을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했다. 이기훈 일병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지역 1,211고지를 3차 점령 후 예하부대와 통신망 확립을 위해 분대원과 함께 유선 보강 작업 중 10월 9일 적 포격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훈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5판-3면-05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4-ㅌ-05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