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화(李基和)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302138
  • 전몰일자 : 19501102

공훈사항

이기화 일병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발악적인 공세를 힘겹게 저지하던 시기인 1950년 9월 7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기화 일병은 가산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9월 15일 기관총과 박격포, 수류탄 등으로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과 수차례 치열한 접전을 수행하며 가산성 가장자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 제13, 제1사단의 패잔병들은 다부동, 가산성 북쪽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며 결국 대구 점령을 위한 북한군 제2군단의 9월 공세는 좌절되었다. 이후 9월 25일 낙동리에서 도하를 완료하고 추격 작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 연대병력은 선산-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소백산맥의 험한 준령을 따라 북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패잔병을 추격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소탕하였다.
이기화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조국 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는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였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10월 24일 박천-운산 도로와 태천-영변 도로의 교차지점인 용산동 남쪽 1km 지점에서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하여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25일 아침 운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일병이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북한군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기습공세가 시작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기화 일병은 1950년 11월 2일 운산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1판-5면-23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2-ㅎ-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