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홍(李基洪)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500605
  • 전몰일자 : 19510519

공훈사항

이기홍 일병은 1931년 10월 17일에 경상북도 대구시 노곡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 및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했던 1950년 10월 중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당시 재창설된 제2사단 제31연대로 배치되었다.
이기홍 일병이 부대에 배치되기 전인 11월 7일, 제2사단은 서울에서 재창설되었다. 이때 제17연대와 신편 된 제31연대와 제32연대를 예속시켰다. 그가 소속된 제31연대는 홍천 일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북한군 패잔병에 대한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 주력은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다시 38선 일대로 철수했다. 당시 제2사단은 12월 8일에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방어선을 점령했다. 곧 다가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 보강에 힘썼다.
드디어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대규모 중공군이 서울을 목표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제2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에서 한 치도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웠으나 후방이 중공군에 의해 차단되면서 방어진지는 와해 되었고 장병들은 후방으로 철수했다. 사단은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청평을 거쳐 여주로 이동한 후 7일에 충주에 도착하여 충주-단양 간 병참선경계를 실시했다. 이후 사단은 2월 13일 안동 일대로 이동하여 후방교란을 일삼던 북한군 제10사단을 소탕하는 데 투입되었다. 사단은 안동에서 속리산-제천 일대로 작전지역을 확대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다가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9군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고 조심스럽게 38도선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5월 10일을 전후하여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징후들이 포착되자 방어로 전환했다. 이기홍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가평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는데, 예상대로 중공군 5월 공세가 5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제2사단은 5월 19일에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방어진지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홍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9판-4면-13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ㅋ-01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