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호(李基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84554
  • 전몰일자 : 19511220

공훈사항

이기호 일병은 1917년 4월 12일에 경기도 여주군(現 여주시) 흥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31일 입대하여, 대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5사단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이기호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1·4후퇴로 37도 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국군과 유엔군이 전력을 회복 후 총반격을 개시하면서 23만 명의 대병력으로 서울재탈환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5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저지한 다음 1951년 2월 5일부로 홍천 포위 공격을 개시하여 적 주력이 4일 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방어거점인 강원도 횡성 일대 317고지-412고지-247고지를 돌파하고 섬강 남쪽으로 진출했다.
이후 사단은 2월 1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 간의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美 제10군단에 배속된 사단은 태기산 전투(3월), 소양강-인제지역 전투(4월), 홍천북방지역 전투(5월), 현리-서화지역 전투(6월) 등에 참가하여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했다. 이로써 사단은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면서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8월에 접어들어 美 제10군단은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강원도 양구 일대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이기호 일병이 소속된 사단은 가칠봉 전투에서 9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북한군 3개 사단과 1,211고지를 3번이나 점령했다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1,211고지를 적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사단은 가칠봉과 서희령을 굳건하게 지켜냈으며, 현 진지를 10월 20일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육본 직할로 전환되어 강원도 양양으로 이동했다. 그 후 사단은 1952년 1월 13일 제1군단에 배속 전환되기 전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에 전념을 하면서 인근 지역에 대한 수색정찰과 매복 작전을 병행했다. 이기호 일병은 분대원과 함께 강원도 거진 지역에서 수색정찰을 하다가 1951년 12월 20일 적과 조우하여 교전 중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전사자 명부에 전사 장소 횡성은 오류).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호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05판-3면-16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4-ㅌ-036)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