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호(이기호)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9200741
  • 전몰일자 : 19510517

공훈사항

이기호 이등중사는 1931년 3월 4일에 출생하였다(출생지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를 거듭하고 있을 때인 1950년 7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기호 이등중사는 낙동강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선에서 아군이 총 반격작전을 수행하게 되자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9월 중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그를 비롯한 장병 모두는 용기백배하여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한 후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사단 병력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벌어진 치열한 교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이어 2월 3일 강릉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하던 중 임계 일대에서 적 유격부대를 발견하고 야간에 포위망을 압축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어 4~7일 사단은 강릉 동남쪽 7㎞전방까지 진출한 후 북한군의 측방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 이 이등중사와 사단 일부 병력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소탕하고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기호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북한군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사력을 다해 분전하던 이기호 이등중사는 1951년 5월 17일 설악산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호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21695 육)을 추서하고 위패(23판-7면-351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ㅂ-05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