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택(李基澤)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1199
  • 전몰일자 : 19510727

공훈사항

이기택 일병은 1921년 11월 7일에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카투사(KATUSA) 병으로 분류되어 미 제1기병사단에 배치되었다.
이기택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왜관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9월 16일부터 반격하여 9월 30일까지 38도선을 회복하고, 10월 8일에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9일에 평양을 탈환 후 미 제8군의 예비가 되었다.
유엔군의 선두부대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할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철수부대를 엄호한 후에 의정부 일대에 위치하였다. 이후 미 제8군 예비로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 시에 조치원 일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단 장병들은 1951년 2월 1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시에 미 제9군단의 우측방을 방호하기 위해 여주 및 양평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2월 21일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작전 시에 사단은 지평리 일대에서 춘천-화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9일에는 화천을 점령하였다. 이후 미 제8군의 예비로 전환되어 수도권에 투입이 용이한 금곡리 일대로 이동했다.
사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1주일만에 격퇴하고, 5월 초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때에 미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었다. 사단은 서서히 북상하여 5월 9일에 의정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다시 금곡리까지 철수했고,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후 즉각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기택 일병이 소속된 미 제1기병사단은 5월 24일부터 의정부-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중순에는 연천을 연하는 선까지 전출하였다. 이후 유엔군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공세행동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방어진지 보강과 작전지역 내 수색활동을 강화했다.
이기택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7월 27일에 작전지역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미군장병들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이기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2면-14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0-ㄷ-08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